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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낡은 선진국 이탈리아 따라가고 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서 포퓰리즘 정치 등 지적한 조귀동 작가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모델은 미국 또는 스웨덴이었다. 현실적인 타협안으로서의 모델은 독일 정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아 보인다.” 조귀동 작가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생각의힘)에서 이대로 간다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이탈리아의 지금 모습과 가장 닮아 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이탈리아는 선진국이긴 하지만,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낡은 선진국이다. 경제는 활력을 찾지 못하고 정치는 포퓰리즘의 굴레에 빠져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 최하위 국가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2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조귀동 작가를 만났다. -미래 한국의 모습을 이탈리아로 예견했더라. “에스핑 안데르센은 복지국가를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미국·영국의 시장중심 자유주의, 프랑스·독일 등 사회보험 중심 보수주의,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민주의다. 여기에 마우리치오 페레라는 남유럽형 가족주의를 더했다. 한국의 복지제도는 남유럽형, 즉 이탈리아에 가장 가깝다. 이탈리아 노동시장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나뉜 이중 구조가 강하다. 연금 등 사회복지가 일자리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중 복지구조도 비슷하다. 높은 자가보유율을 바탕으로 한 자산기반 복지도 한국과 닮았다. 문화적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가족중심주의, 성차별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도 한국처럼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경험한 바 있다. 이탈리아는 단순히 관광대국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조업 중심으로 빠르게 경제가 성장했다. 1970년대 임금 급등, 오일쇼크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0년대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대거 등장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았다. 1인당 GDP는 1974년 영국, 1980년 프랑스를 각각 제쳤다. 1982년 세계 5위 경제대국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1990년대 이후 무너졌다.” -왜 무너졌나.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었지만, 정치적·제도적 영역에서의 개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2년 ‘마니 풀리테’라고 불리는 검찰의 대규모 정치권 수사는 기존 이탈리아의 정치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결과 사회당, 공산당, 기민당이 몰락했다. 역사가 50년이 넘는 정당들이 단지 검찰수사로 일순간에 몰락한 게 아니다. 경제·사회적 구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수십 년간 낡은 정치구조를 유지해온 탓에 지지층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정당들은 이미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공산당은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고, 기민당의 가톨릭 윤리나 코포라티즘(조합주의)은 새로운 시대에 통하지 않았다. 무너진 정치질서의 공백을 메운 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전진이탈리아’를 비롯해 ‘북부동맹’, ‘이탈리아사회운동’ 등 극우 또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었다.” -지금 한국 정치가 이탈리아와 닮았다고 보나. “기존의 정치세력이 대중 소구력을 잃어가면서 포퓰리즘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던 이탈리아의 상황이 한국의 미래처럼 보인다. 현재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의 모습에서 과거 민자당이나 민주당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이재명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민주당이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윤석열 정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이 과거의 보수 정당 정치인들과 같을까. 일례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찬 광복회장을 보자. 이 회장은 2018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 재임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정을 가장 싫어한 사람은 북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 집단을 제외한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임정을 중심으로 포용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보수는 어떤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등 정체성 논쟁을 벌이면서 이종찬 광복회장과 싸우고 있다. 마치 미국에서 대표적인 보수정치인 존 매케인이 밀려나고 트럼프가 등장했듯이 말이다.” -한국 정치도 포퓰리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정당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내세울 수 있는 게 이데올로기 투쟁 같은 포퓰리즘적 요소뿐이다. 지금 보수가 정체성 논쟁을 벌이는 까닭은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는 재정, 사회, 복지, 노동시장, 이민 등 굵직한 과제를 해결할 역량도 의지도 없다. 대신 팟캐스트, 유튜브 등 인터넷 미디어에 기반한 포퓰리즘형 정치가 급격히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전 정부에서 ‘토착왜구’ 등 역사 논쟁을 앞세웠던 것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내세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질서의 기원을 ‘노무현 질서’로 명명했다. ‘노무현 질서’란 무엇인가. “지금 한국의 정치질서, 정당·정치인들의 경쟁방식, 지지자 구성 등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만들어졌다. 정당이 플랫폼 또는 장터 역할을 하고 유력 정치인이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을 끌어모으는 형태의 민주주의다. 결국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무현 질서’라고 이름붙였다. 노무현 질서의 또 다른 한 축은 수출지향 경제의 질적 고도화다. 2000년대 들어 삼성,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들이 질적 성장전략을 쓰면서 이들의 독주가 시작됐다. 그 결과 대기업의 성공에 기반한 상위 중산층 그룹이 형성됐고, 이들에게 맞는 생활양식도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의 집값 담합이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됐다. 황지수 서울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00년대 초중반부터 대졸자 부모와 고졸자 부모의 자녀 양육시간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1980~1990년생 자녀를 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상위 중산층들에게 나타났던 ‘집약적 양육’이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노무현 질서’가 무너졌다고 했다. “한국이 선진국에 가까워질수록 ‘노무현 질서’가 안고 있는 모순은 첨예해진다. 한국사회가 선진국이 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변화, 유권자들의 이해관계 변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지지의 변화 등이 기존 정당들의 기반을 허물어뜨렸다. 민주당을 예로 들면, 민주당은 대도시 상위 중산층과 호남 출신 저소득층이 핵심 지지층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불평등이 심화했고, 이에 따라 두 지지층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벌어지면서 이 결합은 유지될 수 없게 됐다. 단순히 불평등의 심화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분배·재분배 기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과거 민주당 정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상급식’ 같은 복지 정치의 비전이 있었다. 복지 정치의 수혜층을 단순히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사회복지의 주된 수혜층은 중산층이다. ‘복지 정치’라는 기제를 바탕으로 지지연합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과거에는 중산층들이 수혜를 볼 만한 복지의 영역이 꽤 있었다면, 지금은 이 또한 점점 포화상태가 됐고, 중산층이 증세를 꺼리면서 복지 정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는 기존의 지지연합을 유지하지 못했다.” -지지연합이 점점 와해되면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5~10년 단위로 지지정당을 바꾸는 ‘구조적 스윙보터’가 됐다고 했다. 2022년 6월 지방선거 결과를 단적인 예로 들었다. “경기도 시·군·구 기초의회의 민주당 의석 점유율은 2006년 28.3%에서 2018년 64.6%로 꾸준히 늘었으나 2022년 선거에선 51.2%로 줄었다. 호남 출신 이주민과 서울에 거주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화이트칼라가 이탈했다. 경기도 선거 결과는 노무현 정부 시기 형성된 정치질서가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는 점을 시사한다. 자산과 노동시장에서 확대된 불평등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구조 변화, 즉 선진국 진입에 따른 결과다. 민주당의 핵심인 상위 중산층이 이전과 달리 다른 사회계층의 지지를 얻기 힘들어진 건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조귀동 작가의 책 <이탈리아로 가는 길> / 생각의 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사회계약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됐다고 진단했다. “구해근 교수는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한국사회에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작용했다고 했다. ‘중산층’은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폭넓게 쓰였다. 본인이 노력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더 나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중산층’에 집약돼 있다. 이 사회계약이 무너졌다. 대표적 사례가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판교 신혼부부’다. 강남이 아니라 판교라는 것은 이제 부의 원천이 ‘IT 분야’라는 것을 의미하고, 부부 모두 전문직을 상정한다. 15억~20억의 아파트에 살 정도로 돈이 있고, 생활에 여유도 있어서 주말에는 골프를 치는 등 신체적·문화적 자본이 풍부하다. 굉장히 높은 기준인데 이게 바로 상위 중산층의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되면서 결국 아무도 달성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런 것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 중산층 사회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조건이 나아질 수 있다는 어떤 희망, 물적인 토대를 더 이상 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치가 표류하면서 ‘체제 전환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했는데. “저출생이 대표적이다. 1960~1970년대 산업화한 국가들은 한 번씩 출산율 급락을 경험했다. 저출생 문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선진국은 크게 세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스웨덴같이 노사정이 대타협을 해서 노동시장 제도를 뜯어고치거나 미국같이 자유시장에 맡기면서 정부가 이를 보조하는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이 있다. 또 프랑스처럼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재정을 투입하는 한편 동거, 한부모, 재혼 등 비전통적인 가족 구성을 실용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이 있다. 어떤 방식이든 바꾸긴 바꿨다. 가장 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정책 분야에서 개념화한 ‘정책 표류’ 현상이 있다. 정책이 만들어진 여건이 변화하면서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지지만, 제도를 바꾸기 어렵다 보니 이를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그 결과 정책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와해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문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재정 문제다. 한국은 소수의 대기업에 대부분의 세수입을 의존한다. 한 마디로 삼성전자 반도체가 잘 팔리면 재정 흑자가 나고 안 팔리면 적자가 나는 구조다. 이를 고쳐야 하는데 고치지 않는다. 지금 정부의 긴축재정은 대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으니 그냥 안 쓴다는 것이다. 어디에 안 쓰나? 결국 정치적 저항이 적은 데 안 써야 하니 R&D 예산을 줄였다. 의도적으로 R&D를 공격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인 저항이 가장 적은 일만 하겠다는 식으로 정부가 행동하면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부작위의 위기’다. 이 같은 문제들이 연금이든 건강보험이든 모든 영역에서 일어날 것이다. 안 좋은 전조라고 본다.” -새로운 정치질서가 필요한데 왜 등장하지 않고 있는 걸까. “대중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다. 미국에서는 ‘정치질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뉴딜과 신자유주의를 든다. 두 가지 다 분명한 약속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번영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뉴딜도 신자유주의도 통하지 않게 되면서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게 됐다. 결국 중요한 건 정치적인 구조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단순하게 슬로건만으로는 안 되고, 정치 엘리트만으로도 안 된다. 정치 고관여층에만 통하는 일부 정당 조직만으로도 불가능하다. 폭넓은 대중동원이 가능해야 하고, 지식인과 전문가들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폭넓은 이데올로기적 복합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한 정치구조를 만들려면 결국 프로젝트를 제시해야 하는데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내가 전망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고 정치적 실천의 영역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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